불우한 어린 시절이 삶의 값진 경험으로
1835년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수직공(手織工)의 장남으로 태어난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산업혁명의 계기가 된 증기기관이 자동 견직에 응용되면서 아버지가 직장을 잃자 184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앨레기니(Allegheny)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게 된다. 그의 나이 13세였다.
그는 그때부터 직물공장을 비롯한 여러 직업에 종사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전보(電報) 배달사로 근무했을 때 카네기는 사업가들에게 송달되는 전보 내용을 보며 비즈니스 감각을 익히게 되었다. 한편 그의 비즈니스 감각은 1853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취직한 후, 철도사업과 관계 있는 여러 회사에 주식투자를 하면서 빛을 발하게 되고, 막대한 부의 축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림1> 앤드류 카네기

목교(木橋)의 시대에 철교(鐵橋)를 생각하는 선견으로 철강생산의 효율화를 고민
당시 카네기는 철도의 운송량이 많아지는 것을 보고 나무 다리를 철교로 교체하는 수요가 늘어날 것임을 착안해 1862년 키스톤 브리짓(Keystone Bridge Company)을 설립하였는데, 남북전쟁 후 미시시피와 미조리주를 연결하는 철교 건설 수주로 그의 사업은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한편 1865년 카네기는 철강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당시 제철사업은 용광로 회사에서 생산된 선철을 유통단계를 거쳐 최종 제품을 생산하는 별도의 회사로 운반, 이를 다시 가공하는 분업화된 구조였다. 하지만 카네기는 상공정과 하공정을 한 공장에 통합하여 생산효율을 올리고, 제품 단가를 낮추는 한편, 연원료인 코크스(Cokes)를 취급하는 회사에 투자하여 코크스 생산을 통제하였다. 원료에서 최종 제품까지 철강과 관계된 모든 것이 그의 수하에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이런 그를 가리키며 ‘철강왕’이라고 불렀다. 또 카네기는 수익이 나면 다시 생산성 향상을 위해 설비에 재투자하였는데, 1872년에는 베서머제강법에 의한 미국 최초의 거대한 평로(平爐)를 가진 홈스테드 제강소를 건설하였다.
<그림2> 1901년 1월 1일, U.S. Steel 탄생 축하연 사진(Schenly Hotel in Pittsburgh)
사회공헌, 자선사업에도 매진
물론 카네기의 사업에 항상 밝은 빛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92년 노사문제로 이어진 홈스테드 제철소의 파업은 143일이나 이어져 미국 역사상 최악의 노사분쟁으로 기록되었다. 철강왕이라 불리며 성공한 사업가로 존경 받던 카네기가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처우개선 필요성을 외면하고 생산성만 강조하는 사악한 기업가 이미지로 실추되었던 것이다.
이에 카네기는 그 동안 축적한 부를 사회복지를 위해 투자해야겠다고 결심을 한다. 1901년 자신의 철강회사를 J.P. Morgan의 제강회사와 합병하여 미국 철강시장의 65%를 지배하는 US스틸사를 탄생시킨 뒤, 사업가로서의 삶에서 은퇴했다. 이후 카네기는 교육과 문화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본인 재산의 70% 이상인 3억 5,000만 달러를 카네기 공과대학(현 카네기멜론대학)과 카네기교육진흥재단 등에 기부하였으며, 6,500여 개의 도서관을 세우기도 하였다.
1889년 출간된 그의 저서 ‘부의 복음(Gospel of Wealth)’에서 그가 주장한 것처럼, 평생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과 단체를 위해 부의 환원을 실천한 그를 역사는 위대한 사업가이자 사회공헌가로 기억하고 있다.